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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전상범 교수님을 추모하면서...

2021.06.24 19:47

Manager 조회 수:919

전상범 교수님은 지난 20일 오전 11시 33분에 소천하셨습니다. 떠난 이의 명복을 빌어주시고 남은 이들의 아픔을 다독거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희진 올림 2021년 6월 24일

어느 한 남자의 초상

  

그는 한마디로 말해 신사였다. ‘신사’가 용기 있고, 예절을 존중하며, 특히 여성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남자를 일컫는 거라면.

예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사’의 정의에 조금 더 까다로운 조건들을 붙여봐도 그는 명실공히 신사다. 지키기 어려운 조건들이란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자비로우며,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만이 지니는 덕목들을 갖추는 것을 뜻한다.

그가 신사였기에 그의 ‘집사람’인 나는 주부이면서도 아스라이 높다란 학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학문의 길을 걸었기에 경제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독립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소위 「나만의 방」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추운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다가 이따끔 “아아, 이 평화, 아아, 이 안식!” 하고 외치며 총총히 걸어 들어가 머무를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 됐다.

*       *       *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는 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내가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약간 잘하기도 하는 편이었지만 대학을 마친 뒤 두 사람이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은 형편상 무리였다. 

그래서 자연스레 그가 먼저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는 그사이 아이들을 둘씩이나 낳으며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잇따라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보채지도 않는 내게 대학원 진학을 극구 권했다. 그가 유학을 가면 남편 시중이 없어지니 대학원 공부할 시간이 날 거라면서. 이게 이른바 ‘사랑’인지 ‘배려’인지는 아리송하지만 나는 감히 이건 ‘관대함’이라는 기사도적 미덕이라고 단언한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학부 시절) 그는 놀랍게도 이미 자기 시간을 훌륭하게 관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다시 말해서 시도 때도 없이 같이 있어 달라고 보채거나 치대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 시간 관리’는 앞에서 ‘신사’의 정의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마지막으로 열거한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만이 지니는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덕목(주위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것)도 같은 범주에 든다고 하겠다. 그가 한창 젊었을 때 20년 가까이 전국 규모의 출제를 맡아 했다. 한 달씩 집을 비우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이 긴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건강이 염려되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혹시 이런, 저런, 인간적, 아니면 사무적 실수를 할까 봐 염려해 본 적은 없었다.

이 말은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이 그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전혀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이 언저리에서 윤동주의 ‘서시’가 내 목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그냥 이 시가 내가 특별히 좋아해서 읊조리게 된 게 아니라 우연히도 시인이 자신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딱 들어맞는 시를 써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이 ‘서시’는 정말 거짓말처럼 그의 분위기를 콕 짚어낸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희한하게도 이 시는 그를 정확하게 그려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문자 그대로 ‘한 점’은 아니겠지만, 큰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아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       *      *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장기는 투박한 일상을 윤기가 흐르는 시의 경지로 끌어 올리는 비상한 재주이다.

희한하게도 그와 같이 일을 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도 매우 재미있어진다. 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와 함께 일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때가 참 재미있었다”고들 말한다.

많이 웃으면서 작업을 하는데, 놀랍게도 작업 성과는 늘 배가 된다. 그가 작업에 임하느 자세가 치밀하고 성실했기에.

또한,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서 골샌님같이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학자가 아니라, 같이 있으면 무조건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오래 같이 살아 보았더니 그는 자신에겐 지독하게 엄격하고, 타인에겐 끝도 한도 없이 관대한 사람이었다. 같이 사는 동안 이따금 문맥도 없이 ‘참 맑은 사람’, ‘한없이 투명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 때가 많았다.

결혼 생활을 60여 년이나 했지만, 솔직히 나는 ‘사랑’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러나 ‘존경’에 대해선 확신이 있다. 존경했기에 60년이 넘도록 같이 살 수 있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는 소위 식구들, 아내와 아들딸은 물론이고 사위 며느리 손주들까지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살아 보니까 그는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유형의 인간이 아니라, 비리를 보면 비분강개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여린 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자긍심은 강하지만 누구에게나 겸손했다. 꺽둘하게 키만 커서 혹여 거만하지 않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누구에게나 지나칠 정도로 겸손했다.

이리하여 장장 6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하는 내게 누군가가 남편은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나는 거침없이 나의 ‘스승’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스승’이라는 단어에는 자동적으로 ‘존경’의 뜻이 내포돼있다. 쑥스럽지만 85세나 되어서 남편을 존경한다고 할 수 있는 여인,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당사자는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래는 2013, 2014년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음운론학회 강독회에서 여러 교수님들과 함께하신 고 전상범 교수님 사진입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3SKdAO2aooSFPzEIfurrGeIEAJrf0bNe/view?usp=sharing


https://drive.google.com/file/d/1caIUkEZV2TEYJLtEcqOVPR5SgWLPOH7a/view?usp=sharing


https://drive.google.com/file/d/1gDrzoR4p5fv4YaWt_KgK3dYTDUhLIbaP/view?usp=sharing


https://drive.google.com/file/d/1QHP8pZN0lamkzjd5hGFYh5XsbcQ8edZ4/view?usp=sharing


https://drive.google.com/file/d/15GXBkWd7IA_HQFfcvWRAaiT_qqWHJ8yb/view?usp=sh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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